78년 3월 5일. 바로 나의 생일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 부모님 역시 내가 아들이기를 바랐다. 3살위 언니가 있어서 부모님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아들을 낳으려 했다고 한다. 다행히 2년후 남동생이 태어나 부모님 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어머니가 특히 아들을 고대했던 데는 태몽도 한 몫 했다. 천둥번개가 요란한 어느날 용이 승천하는 꿈을 꿨다는 것이다. 당연히 부모님은 아들이면 큰 인물이 되겠다고 믿었다. 그런데 덜커덕 내가 나왔으니 무척 실망하셨을 것이다. 물론 그런 내색은 안하셨지만.
나는 서울 돈암동 근처의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우람한 목청을 자랑해 부모님을 놀라게 했단다. 그때 이미 가수의 길이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데뷔 때부터 성공을 자신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
당시 우리집은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화목했다. 아버지는 사업 초 기여서 고전중이었고 어머니 역시 직장을 다니셨다. 자연 부모님이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지만 우리 형제는 우애가 좋았다. 어린시절 언니나 남동 생과 별로 싸운 기억이 없다.
그때도 나는 키가 컸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뒷자리가 내 몫이었다. 하지만 큰 키와는 상관없이 나는 극히 내성적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었다.
‘꺽순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키는 컸지만 나는 항상 비실비실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의 내 기억은 아파서 병원 응급실이나 입원실에 누워 있던 것 뿐이다. 그리 부유한 가정도 아니었는데 아마 부모님은 병원비 때 문에 크게 고민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뚜렷하게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무기력하고 흐물흐물했다.
한번은 마음먹고 이런 나를 스스로 테스트해봤다. 그러나 역시나 였다. 잠동초등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극기훈련으로 산에 오르는 기회가 있었다 .
나의 몸상태를 누구보다 잘아시는 부모님은 극구 말리셨지만 나는 오기 로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나는 산에 오르다 중 도에 선생님의 부축을 받고 곧바로 내려오게 되었다.
숨이 가빠지고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처량한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 나는 나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무리한 움직임이 있는 자리는 여지없이 피하게 되었다. 체육시간조차도 열외였다.
굉장히 마르고 키가 크다는 것 외에 나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만큼 내성적이었다. 손을 들어 선생님들에게 질문을 한 기억 이 한번도 없을 정도다. 어머니는 이런 나의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 속셈학원,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등에 보내 친구들과 어울리게 했지만 언제나 꿔다놓은 보릿자루였을 뿐 그 어느 것에도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유난히 남동생과 친하다. 친구가 없었고 또 부모님이 맞벌이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남동생과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어린 남동생도 나의 외로움을 알았는지 장난감놀이를 비롯해 스케이트보드, 자전거 타기 등을 하며 나와 같이 놀아주었다.
동생과 노는 것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음악감상이었다. 혼자있을 때 나와 친구는 음악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음악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 같다.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거의 모든 곡들을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많은 레퍼토리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내 노래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극히 내성적이던 성격은 부모님의 노력으로 시간이 갈수록 치유되어갔다 . 미술학원, 피아노학원에서 태권도학원까지 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리게 해주신 부모님의 노력으로 나는 점점 말괄량이 소녀로의 변신을 했다.
특별한 계기없이 성격이 변한다는 것은 주위사람의 끈질긴 관심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내 스스로 놀랄 정도로 명랑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중학교 1년때 처음만난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웃는 내 모 습을 보고 흐믓한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 변신은 기뻤다. 그 때 써놓은 일기장을 보면 충격적인 변화에 대한 심정들이 구구절절이 들어 있다.
어머니가 특히 아들을 고대했던 데는 태몽도 한 몫 했다. 천둥번개가 요란한 어느날 용이 승천하는 꿈을 꿨다는 것이다. 당연히 부모님은 아들이면 큰 인물이 되겠다고 믿었다. 그런데 덜커덕 내가 나왔으니 무척 실망하셨을 것이다. 물론 그런 내색은 안하셨지만.
나는 서울 돈암동 근처의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우람한 목청을 자랑해 부모님을 놀라게 했단다. 그때 이미 가수의 길이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데뷔 때부터 성공을 자신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
당시 우리집은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화목했다. 아버지는 사업 초 기여서 고전중이었고 어머니 역시 직장을 다니셨다. 자연 부모님이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지만 우리 형제는 우애가 좋았다. 어린시절 언니나 남동 생과 별로 싸운 기억이 없다.
그때도 나는 키가 컸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뒷자리가 내 몫이었다. 하지만 큰 키와는 상관없이 나는 극히 내성적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었다.
‘꺽순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키는 컸지만 나는 항상 비실비실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의 내 기억은 아파서 병원 응급실이나 입원실에 누워 있던 것 뿐이다. 그리 부유한 가정도 아니었는데 아마 부모님은 병원비 때 문에 크게 고민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뚜렷하게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무기력하고 흐물흐물했다.
한번은 마음먹고 이런 나를 스스로 테스트해봤다. 그러나 역시나 였다. 잠동초등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극기훈련으로 산에 오르는 기회가 있었다 .
나의 몸상태를 누구보다 잘아시는 부모님은 극구 말리셨지만 나는 오기 로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나는 산에 오르다 중 도에 선생님의 부축을 받고 곧바로 내려오게 되었다.
숨이 가빠지고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처량한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 나는 나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무리한 움직임이 있는 자리는 여지없이 피하게 되었다. 체육시간조차도 열외였다.
굉장히 마르고 키가 크다는 것 외에 나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만큼 내성적이었다. 손을 들어 선생님들에게 질문을 한 기억 이 한번도 없을 정도다. 어머니는 이런 나의 성격을 고쳐주기 위해 속셈학원,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등에 보내 친구들과 어울리게 했지만 언제나 꿔다놓은 보릿자루였을 뿐 그 어느 것에도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유난히 남동생과 친하다. 친구가 없었고 또 부모님이 맞벌이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남동생과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어린 남동생도 나의 외로움을 알았는지 장난감놀이를 비롯해 스케이트보드, 자전거 타기 등을 하며 나와 같이 놀아주었다.
동생과 노는 것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음악감상이었다. 혼자있을 때 나와 친구는 음악이었다. 아마 이때부터 음악은 나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 같다.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거의 모든 곡들을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많은 레퍼토리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내 노래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극히 내성적이던 성격은 부모님의 노력으로 시간이 갈수록 치유되어갔다 . 미술학원, 피아노학원에서 태권도학원까지 다니면서 친구들과 어울리게 해주신 부모님의 노력으로 나는 점점 말괄량이 소녀로의 변신을 했다.
특별한 계기없이 성격이 변한다는 것은 주위사람의 끈질긴 관심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내 스스로 놀랄 정도로 명랑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중학교 1년때 처음만난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얘기하고 웃는 내 모 습을 보고 흐믓한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 변신은 기뻤다. 그 때 써놓은 일기장을 보면 충격적인 변화에 대한 심정들이 구구절절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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