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기타를 친지 3달만에 나는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러던 2학년말쯤 나는 헤비메탈밴드의 일원이 됐다. 기타에 미쳐있으면 서도 공부에 소홀하지 않았던 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재수하던 오빠 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오빠의 친구들이 헤비메탈그룹을 결성하려 했고 마침내가 베이스기타를 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나에게 ‘같이 하자'고 제의를 한 것이다. 이것이 내 음악생활의 첫 경험이었다.
그후로 나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6~7개팀을 전전했다. 그러나 무대경험은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학생때라 돈이 없었던 이유였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학창시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의 무대였다. 그리고 그 공연을 마지막으로 헤비메탈과는 작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여학생들로만 구성된 3.14무한대라는 그룹의 일원이었는데 베이스와 싱어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동구민회관에 꽉 들어찬 또래의 관객들 앞에서 우리는 열정의 시간을 보냈다. 공연을 끝나고 무대에 내려오면서 나는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온 힘을 쏟아낸 것이다. 무대에서의 내 특기는 머리돌리기보다 점프였는데 워낙 점프를 많이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쥐가 났던 것이다.
나는 헤비메탈그룹에서 활동을 하면서 여러가지 음악적인 교훈을 얻었다 . 그중 가장 가슴에 절실히 남는 것은 바로 가수와 관객이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라이브무대에서는 제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관객과 동떨어져서는 열기를 극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교훈은 가수로 인정받는 지금도 가슴속에 담아놓고 되새기고 있다.
헤비메탈을 하면서 무대감각을 익혀왔던 나는 음악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 리지 않고 참석했다. 음악회, 콘서트, 뮤지컬 등 닥치는 대로 구경을 했다 .
특히 내가 자주가고 좋아했던 롤러스케이트장은 내 재능을 키워나가는데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롤러스케이트를 타면서 음악을 듣고 춤도추고 또 무대매너에 필요한 점프를 연습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댄스경연대회가 열리는데 나는 커다란 몸을 유연하게 흔들어 상을 받았던 일도 기억난다.
헤비메탈을 한다고 해서 한 장르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 어느 누구보다 도 다양한 음악을 몸에 섭취하려고 했다. 발라드, 컨츄리, 트로트 등 가리 지 않았다. 그중 댄스음악은 헤비메탈 외에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이었 다.
당시 나는 M.C해머와 바비 브라운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구해 그들과 똑같은 춤을 추려고 밤을 세우기도 했다. 비록 몸이 따르지 않았지만 그들의 환상적인 몸놀림은 나는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선배 한 사람은 “너는 음악에 대한 편견이 없어 앞으로 대중 음악을 해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말을 했다.
사실 헤비메탈을 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대중음악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발라드나 댄스음악이 음악이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 금이나 음악에 대한 철학은 변함이 없다. 음악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좋아 해야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헤비메탈음악과 작별을 했다.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똑같은 경로를 밟은 것이다. 사실 고등학교 때는 부모님들로부터 용돈을 받아 어찌어찌 음악활동을 했지만 졸업하는 순간에는 사회인으로 장래를 생각해야 했다. 대학에서도 자기돈을 써가며 콘서트를 벌일 수는 없으며 또 미래에 대한 조금의 확신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선배들은 물론이고 내친구들도 밥벌이가 안되는 헤비메탈과 모두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노래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재니스 조플린의 열성팬이었다. 흐느끼는 듯한 창법, 폭발할것 같은 감정 그리고 짜릿하게 만드는 가창력 이 나를 매료시켰다. 내 연습곡은 당연히 등 그녀의 노래였고 때 없이 흥얼거렸다.
그러다간 나도 모르게 내지르는 발성을 하곤 했는데 아마도 그때 나를 길거리에서 본 사람들은'어린 나이에 안됐다'고 손가락질 했을 것이다.
96년 나는 명지전문대 유아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솔직한 지금의 내 심정은 대학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얘기를 하면 내 자신이 싫어진다. 대학에 입학한지 6개월도 못다니고 휴학을 한 내가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유아교육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고 또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알고 유아교육과를 선택했는데 한학기도 못다니다니.
그러던 2학년말쯤 나는 헤비메탈밴드의 일원이 됐다. 기타에 미쳐있으면 서도 공부에 소홀하지 않았던 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재수하던 오빠 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오빠의 친구들이 헤비메탈그룹을 결성하려 했고 마침내가 베이스기타를 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나에게 ‘같이 하자'고 제의를 한 것이다. 이것이 내 음악생활의 첫 경험이었다.
그후로 나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6~7개팀을 전전했다. 그러나 무대경험은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학생때라 돈이 없었던 이유였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학창시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의 무대였다. 그리고 그 공연을 마지막으로 헤비메탈과는 작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여학생들로만 구성된 3.14무한대라는 그룹의 일원이었는데 베이스와 싱어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동구민회관에 꽉 들어찬 또래의 관객들 앞에서 우리는 열정의 시간을 보냈다. 공연을 끝나고 무대에 내려오면서 나는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온 힘을 쏟아낸 것이다. 무대에서의 내 특기는 머리돌리기보다 점프였는데 워낙 점프를 많이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쥐가 났던 것이다.
나는 헤비메탈그룹에서 활동을 하면서 여러가지 음악적인 교훈을 얻었다 . 그중 가장 가슴에 절실히 남는 것은 바로 가수와 관객이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라이브무대에서는 제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관객과 동떨어져서는 열기를 극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교훈은 가수로 인정받는 지금도 가슴속에 담아놓고 되새기고 있다.
헤비메탈을 하면서 무대감각을 익혀왔던 나는 음악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 리지 않고 참석했다. 음악회, 콘서트, 뮤지컬 등 닥치는 대로 구경을 했다 .
특히 내가 자주가고 좋아했던 롤러스케이트장은 내 재능을 키워나가는데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롤러스케이트를 타면서 음악을 듣고 춤도추고 또 무대매너에 필요한 점프를 연습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댄스경연대회가 열리는데 나는 커다란 몸을 유연하게 흔들어 상을 받았던 일도 기억난다.
헤비메탈을 한다고 해서 한 장르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 어느 누구보다 도 다양한 음악을 몸에 섭취하려고 했다. 발라드, 컨츄리, 트로트 등 가리 지 않았다. 그중 댄스음악은 헤비메탈 외에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이었 다.
당시 나는 M.C해머와 바비 브라운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들의 뮤직비디오를 구해 그들과 똑같은 춤을 추려고 밤을 세우기도 했다. 비록 몸이 따르지 않았지만 그들의 환상적인 몸놀림은 나는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선배 한 사람은 “너는 음악에 대한 편견이 없어 앞으로 대중 음악을 해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말을 했다.
사실 헤비메탈을 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대중음악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발라드나 댄스음악이 음악이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 금이나 음악에 대한 철학은 변함이 없다. 음악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좋아 해야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헤비메탈음악과 작별을 했다.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똑같은 경로를 밟은 것이다. 사실 고등학교 때는 부모님들로부터 용돈을 받아 어찌어찌 음악활동을 했지만 졸업하는 순간에는 사회인으로 장래를 생각해야 했다. 대학에서도 자기돈을 써가며 콘서트를 벌일 수는 없으며 또 미래에 대한 조금의 확신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선배들은 물론이고 내친구들도 밥벌이가 안되는 헤비메탈과 모두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노래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재니스 조플린의 열성팬이었다. 흐느끼는 듯한 창법, 폭발할것 같은 감정 그리고 짜릿하게 만드는 가창력 이 나를 매료시켰다. 내 연습곡은 당연히 등 그녀의 노래였고 때 없이 흥얼거렸다.
그러다간 나도 모르게 내지르는 발성을 하곤 했는데 아마도 그때 나를 길거리에서 본 사람들은'어린 나이에 안됐다'고 손가락질 했을 것이다.
96년 나는 명지전문대 유아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솔직한 지금의 내 심정은 대학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얘기를 하면 내 자신이 싫어진다. 대학에 입학한지 6개월도 못다니고 휴학을 한 내가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유아교육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고 또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알고 유아교육과를 선택했는데 한학기도 못다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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