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방희중학교에 입학한 후 내 모습은 어릴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느새 명랑, 쾌활의 대명사였다. 오락, 스케이트보드, 태권도에 말뚝박기
까지 모든 일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월담을 많이해 '월담여인'이란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당연히 학교 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횟수가 늘어났고 거리를 배회하는 시간이 늘어감에 따라 간신히 중간성적을 유지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내 모습이 오히려 좋아보였던 모양이다. 말이 없이 집에 박혀있는 딸보다는 당당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는 딸이기를 바랐는지 공부얘기는 별로 하질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말썽부리는 학생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는 모범학생이나 다름없었다. 명랑한 세상을 구경하지 못해 모든 것이 신비롭게 보여 그 세계를 느끼고 싶어하는 호기심 많은 소녀에 불과했다. 월담한다고 해서 친구들을 못살게 하고 남자친구와 못된 짓을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는 얘기.
나는 93년 명성여고에 입학했다. 불교학교였던 까닭이었는지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무척이나 엄했다. 중학교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이 이 곳에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여고생으로 진급한 나는 1학년이 지날 무렵까지는 중학생 때와 변함이 없었다. 친구들과 깔깔대고 또 장난치다 걸려 선생님께 야단맞고. 게다가 공부도 곧잘해 여러모로 괜잖은 학생이었다. 성격이 꾸밈이 없어 선생님들에게 사랑도 받았다.
그렇게 별탈없이 학창생활을 보내던 내게 2학년에 올라갈 무렵 내 인생을 좌우한 변화가 생겼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다. 요즘 애들은 초등학교때 사춘기를 맞는다고 하던데 나는 조금 늦게 사춘기를 맛보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해도 화목하게만 느껴지던 우리 가정 그리고 내 환경이 왜 그리 답답하게 생각되던지. ‘나는 왜 태어났을까’‘우리 집은 왜 다른 사람들처럼 떵떵거리며 살지 못할까’등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현재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구나 하지만 당시에는 밤잠을 설치며 하던 고민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선배언니가 우연히 나에게 CD 한장을 선물했다. 그 CD한 장이 내 인생을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CD는 헤비메탈그룹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이 담겨있었다. 음악을 듣 고 난후 내가 느꼈던 그 감동과 충격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아 세상에 이렇게 멋진 음악이 존재한단 말인가.”
사춘기로 답답해진 마음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솟아날 구멍 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을 듣는 순간 나 는 그 마력에 빠져 “나도 헤비메탈을 한다”는 각오를 하게 됐다.
첫번째 목표는 베이스기타를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버릇이 나 빠진다며 용돈을 거의 주지않았기에 내 스스로 돈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베이스기타를 사서 음악을 해야한다는 일념 하나로 그때부터 아르바이트 전쟁을 시작했다. 음식점, 피자가게는 물론이고 빌려간 비디오를 수거하는 아르바이트까지 가리는 일이 없었다.
아마 고등학교 때 나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한 학생은 없을 것이다.
밤낮없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3달 정도가 지났을까.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베이스기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낙원상가에서 기타를 들고 나 오면서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타를 든 나는 곧바로 명일동에 있던 아시아음악학원을 찾았다. 음악의 기본이라는 베이스기타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한 고생이 시작된 것이다.
열정이 넘치면 그만큼 실력향상도 빠른 법. 나는 하루가 다르게 기타실력 이 늘어만 갔다. 학원 선생님들도 “너는 천부적인 감각을 지녔다”는 말 을 수시로 할 정도였다.
당연히 학교 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횟수가 늘어났고 거리를 배회하는 시간이 늘어감에 따라 간신히 중간성적을 유지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내 모습이 오히려 좋아보였던 모양이다. 말이 없이 집에 박혀있는 딸보다는 당당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는 딸이기를 바랐는지 공부얘기는 별로 하질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말썽부리는 학생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는 모범학생이나 다름없었다. 명랑한 세상을 구경하지 못해 모든 것이 신비롭게 보여 그 세계를 느끼고 싶어하는 호기심 많은 소녀에 불과했다. 월담한다고 해서 친구들을 못살게 하고 남자친구와 못된 짓을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는 얘기.
나는 93년 명성여고에 입학했다. 불교학교였던 까닭이었는지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무척이나 엄했다. 중학교때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이 이 곳에서는 불가능해 보였다.
여고생으로 진급한 나는 1학년이 지날 무렵까지는 중학생 때와 변함이 없었다. 친구들과 깔깔대고 또 장난치다 걸려 선생님께 야단맞고. 게다가 공부도 곧잘해 여러모로 괜잖은 학생이었다. 성격이 꾸밈이 없어 선생님들에게 사랑도 받았다.
그렇게 별탈없이 학창생활을 보내던 내게 2학년에 올라갈 무렵 내 인생을 좌우한 변화가 생겼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다. 요즘 애들은 초등학교때 사춘기를 맞는다고 하던데 나는 조금 늦게 사춘기를 맛보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해도 화목하게만 느껴지던 우리 가정 그리고 내 환경이 왜 그리 답답하게 생각되던지. ‘나는 왜 태어났을까’‘우리 집은 왜 다른 사람들처럼 떵떵거리며 살지 못할까’등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현재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구나 하지만 당시에는 밤잠을 설치며 하던 고민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선배언니가 우연히 나에게 CD 한장을 선물했다. 그 CD한 장이 내 인생을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CD는 헤비메탈그룹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이 담겨있었다. 음악을 듣 고 난후 내가 느꼈던 그 감동과 충격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아 세상에 이렇게 멋진 음악이 존재한단 말인가.”
사춘기로 답답해진 마음이 시원하게 뚫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솟아날 구멍 이 있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음악을 듣는 순간 나 는 그 마력에 빠져 “나도 헤비메탈을 한다”는 각오를 하게 됐다.
첫번째 목표는 베이스기타를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버릇이 나 빠진다며 용돈을 거의 주지않았기에 내 스스로 돈을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베이스기타를 사서 음악을 해야한다는 일념 하나로 그때부터 아르바이트 전쟁을 시작했다. 음식점, 피자가게는 물론이고 빌려간 비디오를 수거하는 아르바이트까지 가리는 일이 없었다.
아마 고등학교 때 나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한 학생은 없을 것이다.
밤낮없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3달 정도가 지났을까.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베이스기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낙원상가에서 기타를 들고 나 오면서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타를 든 나는 곧바로 명일동에 있던 아시아음악학원을 찾았다. 음악의 기본이라는 베이스기타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한 고생이 시작된 것이다.
열정이 넘치면 그만큼 실력향상도 빠른 법. 나는 하루가 다르게 기타실력 이 늘어만 갔다. 학원 선생님들도 “너는 천부적인 감각을 지녔다”는 말 을 수시로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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