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1집때 자료

<그녀와의 이별> 히트 조짐

갈매기에요 2006. 9. 25. 21:32
어떤 사람들은 ‘음악을 하려면 음악대학을 가지 왜 유아교육과를 갔느냐 ’고 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생각과는 달리 내가 전공하는 음악 외에 다른 방면의 세계도 알고 싶었기 때문에 음악과는 전혀 다른 과를 선택했다.

아이를 좋아했고 또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많이 알고 있던 터라 아무런 흔들림없이 유아교육을 택했다. 그러나 6개월도 못가다니.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막연한 생각으로 들어갔던 유아교육이 그처럼 어려운 일인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휴학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휴학을 한후 나는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키워갔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또 충고를 던져줄 사람도 없었기에 무작정 몸으로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 나는 97년 봄부터 가수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으며 데모테잎을 만들기 시작했다. 데모테잎을 만들어 아무 레코드사나 찾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알음알음으로 줏어들은 몇 군데 음반 기획사를 찾아갔다. 예상대로 퇴짜였다. 그 당시에 나는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괜찮게 추는데 왜 그럴까’하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었다. 가요계가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기때문이다. 지금의 내 모습도 하늘이 주신 선물이지 내 능력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다. 그러던중 나의 음반을 제작하겠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97년 여름 나는 신인 음반제작자(지금은 가요계를 떠나 이름 밝히기를 꺼림)를 만나 곧바로 음반제작에 들어갔다. <걸어서 하늘까지>란 노래로 유명한 최규성씨를 프로듀서로 영입해 녹음을 시작했다. 그 분은 바로 나의 오늘을 있게한 <그녀와의 이별>을 작곡한 분이다.

제작자나 나나 모두 신인이어서 열과 성을 다해 음반을 만들었다. 무더위 가 기승을 부렸지만 그 흔한 수영장 한번 가지 못하고 녹음실에서 살았다 .

몸이 아파도 강행군을 했다. 타이틀곡 <그녀와의 이별>을 녹음하는 날이었다. 매일같이 녹음과 연습에 매달렸던 나는 그날따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쉬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빨리 녹음을 끝내고 내 노래가 담긴 음반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무리를 하던 나는 결국 망막의 실핏줄이 터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눈에서 피가 흘렀고 당황한 나는 눈물을 쏟아내 그야말로 눈물과 피가 범벅된 날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간단히 지혈을 하고 그날 잡혀있던 2프로 (1프로당 3시간 30분)의 녹음시간을 모두 마쳤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녹음을 했으니 꼭 히트해야 하는데 ...” 녹음을 마치고 나오는 나의 뒤에서 누군가 던진 이 한마디는 그날의 고통을 말끔 히 씻게 해 주었다.

<그녀와의 이별>이 히트할 것이란 조짐은 내가 녹음을 하면서 망막이 터졌 다는 사실외에 또 한가지가 있다. 가요계에는 히트를 예감하는 징크스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인 녹음중 정전을 경험한 것이다.

녹음하던중 정전이 되면 그날 녹음한 것들이 헛수고가 되는데 고생한 만 큼 그 음반은 꼭 히트를 한다는 것이다.

그일이 있은 후 엔지니어 등 주위사람들이 “너는 성공할 수 있다”는 덕담 을 던져주었고 나는 막연히 스타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희망은 음반이 나오면서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따끈따끈한 음반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의 그 감동과 환희도 잠깐. 꿈에 부풀었던 가수활동은 그렇게 미지근할 수가 없었다. 초보였던 제작자가 음반은 만들어냈지만 이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야하는지 허둥댔던 것이다.

그분이나 나나 신인이었던 까닭에 열정은 있었지만 평탄한 길을 찾지 못 하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이렇다할 무대에서 노래한번 불러보지 못하고 서서히 시들어갔 다. 간간히 나오던 노래도 3월 들어서면서 뚝 끊기고 말았다.

나는 여기서 나의 가수생활이 끝나는구나 하는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 그 고생을 하면서 만든 앨범인데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하다니.